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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 대한제국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던 날

by 배움로드 2025.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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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조약, 대한제국의 마지막 불꽃이 꺼지던 날

 

1905년,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주변 열강들의 침략적 야심 속에서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곧 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바로 그 해 11월, 일본은 강압적인 무력과 기만적인 방식으로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조약 체결을 넘어, 한 국가의 주권을 뿌리째 흔들고 민족의 존립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상처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1905년, 그 암울했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을사조약의 배경과 그에 저항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해보고자 합니다.

 

을사조약 체결의 배경과 과정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일본은 국제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에,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에게 각각 한반도 지배를 승인받았으며, 9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의 간섭까지 배제하며 대한제국을 사실상 자신들의 보호국으로 만들 국제적 명분을 완성했습니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에 대한 보호국화를 목표로 삼고,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를 압박하여 조약 체결을 강요했습니다.

궁정 내부에서는 한규설, 민영환 등 조약 체결에 강력히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본군에 포위된 중명전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에 굴복한 박제순, 이근택,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등 5명의 대신이 결국 조약에 찬성하는 불법적인 절차를 거치게 됩니다. 이들은 훗날 '을사오적'이라 불리며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조약은 국왕의 비준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조약이었으나, 일본은 이를 빌미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 전반에 대한 간섭을 시작했습니다.

을사조약은 단순한 외교 협약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한제국이라는 국가의 생명줄을 끊어버린 치명적인 비수였다. -익명-

조약에 맞선 저항의 불꽃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알려지자 전국은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습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실어 통곡하며 이 비극적인 현실을 비판했습니다.

그의 글은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민족의 울분을 대변했습니다.

민영환은 '백성이여, 나는 죽어도 우리 대한의 국권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잊지 않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여 나라 잃은 백성들에게 깊은 슬픔과 함께 항일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조병세 또한 자결로써 항거의 뜻을 밝혔으며, 최익현과 신돌석 등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섰습니다.

 

고종황제 또한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고, 1907년에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하는 등 외교적인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열강들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묵인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노력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외교권 박탈이라는 현실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비극적인 사례였습니다.

한 나라의 주권은 그 나라 국민의 손에 달려있다. 외교권은 그 주권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을사조약은 이를 빼앗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익명-

을사조약 이후의 비극과 저항의 지속

을사조약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통해 대한제국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해산하고,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빼앗으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의병 활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애국계몽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을사조약은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지만, 동시에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강력한 저항의 불씨를 지핀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를 완전히 잃게 된 이후에도, 이 저항의 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져 마침내 광복이라는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을사조약은 단순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수많은 희생과 투쟁으로 이어진 우리 민족의 고난과 극복의 서막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를 잃는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저항했던 선조들의 정신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뿌리이다. -익명-

1905년 을사조약 전후 주요 사건 일지

날짜 사건 내용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일본의 한반도 지배 야심 표출
1905년 7월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묵인
1905년 8월 제2차 영일동맹, 영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 묵인
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 러일전쟁 종결 및 러시아의 한반도 영향력 상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강제 체결, 대한제국 외교권 박탈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논설 발표
1905년 11월 30일 민영환,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자결
1906년 최익현 등 의병 활동 전개, 전국적인 항일 운동 확산
1907년 고종 황제,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조약의 부당성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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